로고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
로그인 회원가입
  • 패션클러스터
  • 패션클러스터

    패션클러스터

    청계천 맑아지면 세계의 시장 된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05회 작성일 05-02-01 11:03

    본문

    흥인지문 옹성 설치 뒤 상업자본 유입

    “물이 흐르면 돈도 모여들어”

    글 최영주 언론인·풍수지리연구가 (sinmun03@hanmail.net)
    http://www.econopia.com 이코노미스트 게재기사



    정도전은 무척 망설였다.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경복궁 터와 학궁(성균관), 사직단, 그리고 종묘의 위치까지는 규범에 따라 정했다. 그러나 도성(都城)의 마지막 경계를 어디로 할 것인가에 이르자 여러 생각이 엇갈렸던 것이다. 서쪽은 인왕산을 자연 경계로 하면 되지만 동쪽이 문제였다.
    .
    멀리 나가면 경복궁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그렇다고 청룡인 낙산 줄기를 경계로 하면 도성 안이 너무 좁다. 무학대사의 말처럼 경복궁을 인왕산 밑으로 정했다면 동쪽으로 뻗어나가 멀리 아차산 줄기에 내성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무학대사와는 한판 승부를 끝내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경북궁의 위치까지 확정했다.
    .
    이런 그의 고민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서설(瑞雪)설’이다. 때마침 한양 주위에 내린 눈이 녹기 시작했는데 묘하게 현재 도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만 눈이 녹았다. 정도전은 “하늘이 점지한 것”이라며 눈이 녹은 자리를 따라 축성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양의 도성은 이렇게 결정됐다.
    .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당수(內堂水)인 개천(청계천의 본래 이름)이 빠져 나가는 곳이 엉성했다.(내당수는 청룡·백호 범위 안에서 흐르는 물을 가리키고, 외당수는 범위 바깥으로 흐르는 물을 지칭한다. 청계천은 서울의 내당수이고 한강은 외당수에 해당한다) 사대문 안의 기를 갈무리하기에는 힘이 매우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보책으로 훈련원 자리를 흥인지문(동대문) 근처로 정했다.
    .
    지금 을지로6가에 있는 훈련원공원과 동대문운동장을 훈련원 터로 삼았다. 군사들이 모여 훈련하게 함으로써 지기(地氣)를 다지려고 했던 것. 또 개천의 중심인 종로2가 일대에 시전(市廛)을 설치했다. 이 역시 개천이 누설하는 지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된 이래 역대 조정은 개천을 살리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개천으로 모여들어 동대문 쪽으로 빠져나간다. 문제는 종로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개천이 더러워지고 간혹 홍수로 범람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준설공사를 했고, 급기야는 이름마저 ‘청계천’(淸溪川)으로 바꿨다.
    .
    조선 후기에 이르자 지금의 종로4가와 5가 일대를 중심으로 상업자본이 유입됐다. 흥인지문에 옹성을 설치한 결과였다. 옹성은 적을 방어하는 데도 유리하지만 풍수적으로는 청계천의 수구(물 빠지는 곳)를 더욱 단단히 조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원래 수구에는 자본이 모여들게 돼 있다. 동대문시장이 개설된 것은 1905년 일제의 강제협약이 체결되기 전이다. 지금의 광장시장이 그곳이다.
    .
    광복 이후 6·25를 겪으면서도 이 상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복개공사가 시작되고 고가차도가 건설되면서 동대문시장의 황금기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70년 11월에는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
    이런 곳에 다시 변화가 온 것은 90년대 말이다. 고층상가가 곳곳에 들어선 것이다. 뒤따라 청계천 복원공사도 시작됐다. 천기와 지기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르면 돈도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될 것이다. 동대문시장은 청계천, 곧 물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청계천이 마르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한 동대문시장은 ‘세계의 시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
    정도전은 무척 망설였다.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경복궁 터와 학궁(성균관), 사직단, 그리고 종묘의 위치까지는 규범에 따라 정했다. 그러나 도성(都城)의 마지막 경계를 어디로 할 것인가에 이르자 여러 생각이 엇갈렸던 것이다. 서쪽은 인왕산을 자연 경계로 하면 되지만 동쪽이 문제였다.
    .
    멀리 나가면 경복궁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그렇다고 청룡인 낙산 줄기를 경계로 하면 도성 안이 너무 좁다. 무학대사의 말처럼 경복궁을 인왕산 밑으로 정했다면 동쪽으로 뻗어나가 멀리 아차산 줄기에 내성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무학대사와는 한판 승부를 끝내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경북궁의 위치까지 확정했다.
    .
    이런 그의 고민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서설(瑞雪)설’이다. 때마침 한양 주위에 내린 눈이 녹기 시작했는데 묘하게 현재 도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만 눈이 녹았다. 정도전은 “하늘이 점지한 것”이라며 눈이 녹은 자리를 따라 축성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양의 도성은 이렇게 결정됐다.
    .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당수(內堂水)인 개천(청계천의 본래 이름)이 빠져 나가는 곳이 엉성했다.(내당수는 청룡·백호 범위 안에서 흐르는 물을 가리키고, 외당수는 범위 바깥으로 흐르는 물을 지칭한다. 청계천은 서울의 내당수이고 한강은 외당수에 해당한다) 사대문 안의 기를 갈무리하기에는 힘이 매우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보책으로 훈련원 자리를 흥인지문(동대문) 근처로 정했다.
    .
    지금 을지로6가에 있는 훈련원공원과 동대문운동장을 훈련원 터로 삼았다. 군사들이 모여 훈련하게 함으로써 지기(地氣)를 다지려고 했던 것. 또 개천의 중심인 종로2가 일대에 시전(市廛)을 설치했다. 이 역시 개천이 누설하는 지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된 이래 역대 조정은 개천을 살리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개천으로 모여들어 동대문 쪽으로 빠져나간다. 문제는 종로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개천이 더러워지고 간혹 홍수로 범람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준설공사를 했고, 급기야는 이름마저 ‘청계천’(淸溪川)으로 바꿨다.
    .
    조선 후기에 이르자 지금의 종로4가와 5가 일대를 중심으로 상업자본이 유입됐다. 흥인지문에 옹성을 설치한 결과였다. 옹성은 적을 방어하는 데도 유리하지만 풍수적으로는 청계천의 수구(물 빠지는 곳)를 더욱 단단히 조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원래 수구에는 자본이 모여들게 돼 있다. 동대문시장이 개설된 것은 1905년 일제의 강제협약이 체결되기 전이다. 지금의 광장시장이 그곳이다.
    .
    광복 이후 6·25를 겪으면서도 이 상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복개공사가 시작되고 고가차도가 건설되면서 동대문시장의 황금기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70년 11월에는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
    이런 곳에 다시 변화가 온 것은 90년대 말이다. 고층상가가 곳곳에 들어선 것이다. 뒤따라 청계천 복원공사도 시작됐다. 천기와 지기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르면 돈도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될 것이다. 동대문시장은 청계천, 곧 물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청계천이 마르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한 동대문시장은 ‘세계의 시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