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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평 가게 권리금이 5억원 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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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415회 작성일 05-01-28 18:08

    본문

    1905년 의류시장 싹 틔워…"포목시장이 패션클러스터 됐네"


    글 김명룡 기자 (dragong@joongang.co.kr)
    http://www.econopia.com 이코노미스트 게재기사



    당연히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대문시장. 그러나 지금의 동대문시장이 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18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대문시장은 종로 상인들에게 밀린 소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던 조그만 시장에 불과했다. 조선시대부터 배오개(梨峴) 혹은 배우개장으로 부르던 곳으로 쌀·어물·잡화 등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
    그러나 1899년 서대문에서 동대문을 걸쳐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노선이 완공되면서 동대문의 상권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본격적으로 동대문시장이 성장한 것은 1905년 종로상권에서 일본 상인들에게 밀린 포목상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다. 이것을 계기로 동대문시장은 의류시장의 싹을 틔우게 된다.
    .
    포목 상인들은 당시 미나리 밭이었던 뚝섬의 흙을 퍼다 날라 지은 건물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들은 종로5가와 청계천5가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청계천의 두 다리(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고 해 광장시장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게 생겨난 광장시장은 도매업에서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수완을 발휘했고, 20년 중반 이후에는 포목 부문에서는 국내 최고의 상가로 번창했다.
    .
    30년대 후반 국내 면직물의 생산과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동대문 포목상들은 도소매를 겸하며 호황기를 맞이한다.
    .
    전쟁 이후 피난민 몰려 상권 형성
    .
    그러나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초기 세워졌던 목조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모두 타버려 59년 지금의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섰다. 광장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구호의류가 시장에 흘러들면서 포목·양장·옷감 등을 취급하는 의류도매시장으로 바뀌게 된다.
    .
    전쟁 이후 동대문시장에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난민이 광장시장 근처 청계천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 "피난 온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구해다 팔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의류 공장을 세우면서 동대문시장에 자리를 잡게 된 거죠."
    .
    선친이 50년대 동대문에 자리를 잡은 뒤 이곳에서 계속 의류사업을 해 왔다는 혜양엘리시움의 양홍섭(54) 대표는 "동대문시장 상가 중에서 청평화·신평화·제일평화 등 '평화'자 돌림 상가들은 대부분 이북 실향민이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원두막과 흡사한 무허가 상점이 청계천변에 즐비하게 들어섰다. 그러다가 58년 대형 화재로 2,000여개에 이르던 노점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
    그리고 59년에는 남은 노점들도 모두 철거되고 청계천은 복개됐다. 복개된 청계천 주변에는 61년 7만4,000여 평의 근대적 상가인 평화시장이 세워졌다.이때부터 구호물자가 끊기고 나일론 같은 화학섬유가 생산되자 건물 2, 3층에 공장을 차리고 옷을 만들어 팔았다. 공장이라고 해야 다닥다닥 붙은 좁은 판잣집에 재봉틀 2~3대를 놓고 작업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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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과정에서 광장시장을 시작으로 동대문종합시장까지 이어지는 원단, 부자재상가가 들어섰다. 동대문시장은 싼 임금과 저가 원자재를 무기로 본격적인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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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남대문을 제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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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동대문시장에는 아트프라자라는 도매상가가 들어선다. 이 즈음의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의 상품을 비교해 보면 남대문은 비싼 의류를, 동대문은 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인식됐다. 옷을 만드는 데 드는 공임도 남대문에 비해 동대문이 3분의 1 이상 저렴했다. 남대문은 지방 상인들에게 제품의 품질로, 동대문은 박리다매로 승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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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남대문이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승부수를 던진 것은 동대문시장의 아트프라자. 아트프라자는 개장시간을 저녁 10시로 당겼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밤 12시에 개장했다. 그리고 지방 상인들을 태우고 오는 버스운전사들에게 뒷돈을 줘가며 동대문시장에 먼저 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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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되면 지방 상인들이 동대문시장에 들렀다가 남대문으로 가게 되는데, 동대문이 물건이 싸잖아. 지방 상인들은 자연히 동대문에서 물건을 많이 사게 되지. 그러고 나면 남대문 가서 물건 살 돈이 없게 되거든. 동대문이 엄청나게 장사가 잘 됐지. 아트프라자 상인들도 신났지. 제품의 질도 자연히 좋아지게 됐고…."(양홍섭 대표)
    .
    양대표는 90년대 초반 당시 "점포가 450개 정도 되는 아트프라자에 외제차 몰고 다니는 상인이 100여명은 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며 "1.3평 정도 되는 점포 1개의 권리금이 5억원까지 치솟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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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돈의 흐름을 좇는 것이 상인들의 속성이다. 동대문의 호황을 그냥 뒀을 리 없다. 이때부터 동대문시장에는 의류도매 전문 상가들이 봇물 터지듯 생겨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우노꼬레·팀204·거평프레야·혜양엘리시움 등 상가들이 생겨났다. 새로 건립된 상가의 빈자리는 남대문 상인들이 채워나갔다. 남대문과 동대문 상인들이 어우러져 의류 도매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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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소매시장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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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IMF와 함께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는다. 동대문 도매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와중인 98년에 밀리오레가 생겼다. 거대한 도매상가로 계획했지만 밀리오레 측은 소매로 급선회했다. 지방 상권이 다 죽은 마당에 도매시장을 시작하면 잘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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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밀리오레는 불황의 수혜자가 된다. 밀리오레는 대기업 의류 업체에서 밀려난 디자이너들과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한 패션학과 관련 학생들의 좋은 대안이 됐다. 경기를 많이 타는 의류업종인지라 밀리오레의 임대료는 기존 상가보다 훨씬 저렴했다. 당시 밀리오레 1층 입주 보증금은 1,5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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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에 젊은 상인들이 몰려들어 젊은 상가를 만들었다. 디자인 실력을 갖춘 이들의 가세로 밀리오레는 업그레이드된 디자인의 제품을 선보이게 된다. 게다가 동대문시장의 옷값은 다른 곳보다 훨씬 저렴했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젊은 소비자들이 동대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99년에는 두산타워(두타)가 개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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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이 2,000억원을 들여 만든 이 건물에는 새로운 성공을 노리는 수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동대문 소매시장은 밀리오레와 두타라는 양대 상가를 중심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밀리오레와 두타는 마케팅 면에서도 기존의 상가와 달랐다. 상가 앞에서는 매일 이벤트가 열렸고 동대문은 젊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소매시장이 활발하게 발달하는 사이 도매시장도 새로운 건물이 속속 생겨나고 규모가 더 커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당연히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대문시장. 그러나 지금의 동대문시장이 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18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대문시장은 종로 상인들에게 밀린 소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던 조그만 시장에 불과했다. 조선시대부터 배오개(梨峴) 혹은 배우개장으로 부르던 곳으로 쌀·어물·잡화 등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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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1899년 서대문에서 동대문을 걸쳐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노선이 완공되면서 동대문의 상권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본격적으로 동대문시장이 성장한 것은 1905년 종로상권에서 일본 상인들에게 밀린 포목상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다. 이것을 계기로 동대문시장은 의류시장의 싹을 틔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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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목 상인들은 당시 미나리 밭이었던 뚝섬의 흙을 퍼다 날라 지은 건물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들은 종로5가와 청계천5가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청계천의 두 다리(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고 해 광장시장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게 생겨난 광장시장은 도매업에서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수완을 발휘했고, 20년 중반 이후에는 포목 부문에서는 국내 최고의 상가로 번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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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대 후반 국내 면직물의 생산과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동대문 포목상들은 도소매를 겸하며 호황기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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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이후 피난민 몰려 상권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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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초기 세워졌던 목조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모두 타버려 59년 지금의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섰다. 광장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구호의류가 시장에 흘러들면서 포목·양장·옷감 등을 취급하는 의류도매시장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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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이후 동대문시장에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난민이 광장시장 근처 청계천에 몰려들기 시작한 것. "피난 온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구해다 팔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의류 공장을 세우면서 동대문시장에 자리를 잡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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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친이 50년대 동대문에 자리를 잡은 뒤 이곳에서 계속 의류사업을 해 왔다는 혜양엘리시움의 양홍섭(54) 대표는 "동대문시장 상가 중에서 청평화·신평화·제일평화 등 '평화'자 돌림 상가들은 대부분 이북 실향민이 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원두막과 흡사한 무허가 상점이 청계천변에 즐비하게 들어섰다. 그러다가 58년 대형 화재로 2,000여개에 이르던 노점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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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59년에는 남은 노점들도 모두 철거되고 청계천은 복개됐다. 복개된 청계천 주변에는 61년 7만4,000여 평의 근대적 상가인 평화시장이 세워졌다.이때부터 구호물자가 끊기고 나일론 같은 화학섬유가 생산되자 건물 2, 3층에 공장을 차리고 옷을 만들어 팔았다. 공장이라고 해야 다닥다닥 붙은 좁은 판잣집에 재봉틀 2~3대를 놓고 작업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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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과정에서 광장시장을 시작으로 동대문종합시장까지 이어지는 원단, 부자재상가가 들어섰다. 동대문시장은 싼 임금과 저가 원자재를 무기로 본격적인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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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남대문을 제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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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동대문시장에는 아트프라자라는 도매상가가 들어선다. 이 즈음의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의 상품을 비교해 보면 남대문은 비싼 의류를, 동대문은 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인식됐다. 옷을 만드는 데 드는 공임도 남대문에 비해 동대문이 3분의 1 이상 저렴했다. 남대문은 지방 상인들에게 제품의 품질로, 동대문은 박리다매로 승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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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남대문이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승부수를 던진 것은 동대문시장의 아트프라자. 아트프라자는 개장시간을 저녁 10시로 당겼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밤 12시에 개장했다. 그리고 지방 상인들을 태우고 오는 버스운전사들에게 뒷돈을 줘가며 동대문시장에 먼저 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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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되면 지방 상인들이 동대문시장에 들렀다가 남대문으로 가게 되는데, 동대문이 물건이 싸잖아. 지방 상인들은 자연히 동대문에서 물건을 많이 사게 되지. 그러고 나면 남대문 가서 물건 살 돈이 없게 되거든. 동대문이 엄청나게 장사가 잘 됐지. 아트프라자 상인들도 신났지. 제품의 질도 자연히 좋아지게 됐고…."(양홍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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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대표는 90년대 초반 당시 "점포가 450개 정도 되는 아트프라자에 외제차 몰고 다니는 상인이 100여명은 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며 "1.3평 정도 되는 점포 1개의 권리금이 5억원까지 치솟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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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돈의 흐름을 좇는 것이 상인들의 속성이다. 동대문의 호황을 그냥 뒀을 리 없다. 이때부터 동대문시장에는 의류도매 전문 상가들이 봇물 터지듯 생겨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우노꼬레·팀204·거평프레야·혜양엘리시움 등 상가들이 생겨났다. 새로 건립된 상가의 빈자리는 남대문 상인들이 채워나갔다. 남대문과 동대문 상인들이 어우러져 의류 도매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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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소매시장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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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IMF와 함께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는다. 동대문 도매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와중인 98년에 밀리오레가 생겼다. 거대한 도매상가로 계획했지만 밀리오레 측은 소매로 급선회했다. 지방 상권이 다 죽은 마당에 도매시장을 시작하면 잘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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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밀리오레는 불황의 수혜자가 된다. 밀리오레는 대기업 의류 업체에서 밀려난 디자이너들과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한 패션학과 관련 학생들의 좋은 대안이 됐다. 경기를 많이 타는 의류업종인지라 밀리오레의 임대료는 기존 상가보다 훨씬 저렴했다. 당시 밀리오레 1층 입주 보증금은 1,5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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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에 젊은 상인들이 몰려들어 젊은 상가를 만들었다. 디자인 실력을 갖춘 이들의 가세로 밀리오레는 업그레이드된 디자인의 제품을 선보이게 된다. 게다가 동대문시장의 옷값은 다른 곳보다 훨씬 저렴했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젊은 소비자들이 동대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99년에는 두산타워(두타)가 개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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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이 2,000억원을 들여 만든 이 건물에는 새로운 성공을 노리는 수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동대문 소매시장은 밀리오레와 두타라는 양대 상가를 중심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밀리오레와 두타는 마케팅 면에서도 기존의 상가와 달랐다. 상가 앞에서는 매일 이벤트가 열렸고 동대문은 젊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소매시장이 활발하게 발달하는 사이 도매시장도 새로운 건물이 속속 생겨나고 규모가 더 커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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