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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인지문(興仁之門, 흥인문, 속칭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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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81회 작성일 04-10-27 20:05

    본문

    【명 칭】 서울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분 류】 성문
    【지정사항】 보물 제1호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 69

    흥인문은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방위하기 위하여 도성을 축성할 때 함께 건설된 문이다. 태조 5년(1396) 9월 건설되어 현재까지 590년 간 내려오는 동안 수차에 걸친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그 원형만은 현재까지 보전되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 흥인문 부근은 지형이 낮고 습한 곳이므로 도성을 축조할 때부터 역군들이 많은 고난을 겪었다. 이 곳에 축성을 하려면 먼저 말뚝을 박고 돌을 채운 다음 성을 쌓게 되어 공력이 다른 데보다 배나 들었다. 그러므로 이 곳의 축성을 담당하였던 경상도 성주 · 안동 역군들은 10여 일분의 공역을 남겨 둔 채 귀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다른 곳은 성이 다 완성되었는데 이 곳만은 완성치 못하였다가 동년 9월 2차 공사 때 완성하였고 흥인문도 이 때에 건설되었다. 흥인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곡성(曲城)또는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태조 6년(1397) 1월 27일에 태조가 친히 동대문에 나가서 옹성의 기지를 보고[註]동년 4월 28일에 왕이 흥인문에 나가서 옹성을 보고 성을 돌아 동소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註]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적을 방어하기에 부족한 자연조건을 인공적으로 보충하려 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 서전문(西箭門)에 옹성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역군 1,000명을 계정(計定)하였으나 이 역군으로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보다 남쪽에 서전문을 옮기고 그 문명을 돈의문(敦義門)이라고 하였으며,[註]성종 10년(1479)에 숭례문을 개건할 때에 좌승지 김승경이 중국에는역참(驛站)의 성문에도 모두 옹성이 있으니 이 예에 의하여 숭례문도 옹성 쌓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성종은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 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註]라고 하여 거부하였다.

    이와 같이 돈의문과 숭례문은 옹성을 쌓지 않았으므로 옹성이 있는 성문은 오로지 흥인문이었다.

    흥인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에 다시 개건하였다. 이 때의 경기 · 충청 · 전라도의 수군을 동원하여 도성을 수축하였는데 공사가 예정보다 일찍 끝났으므로 그 군정(軍丁)을 나누어서 동대문과 동소문을 수리하였다니[註]그 동대문 개건이라는 것은 소규모의 보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또한 단종 원년(1453) 4월에 사헌부의 논계(論啓)에 「근래에 국가의 일이 많아 두 능(세종과 문종)의 역사가 서로 이어 있는데 또 흥인문을 개작하고 그 역이 끝나자 또 수문을 개축하니 민력이 다하였습니다.[註]」


    이 때에 건축한 흥인문은 2층 우진각기와지붕다포(多包)집으로 하층 정면은 5칸(72.5척), 하층 측면은 2칸(24.1척)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흥인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이 그대로 있으나 그 기능은 옛날의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흥인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도로를 개설하여 모든 통행을 이 도로로 하고 있으니 흥인문은 도로의 한가운데 우뚝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할 뿐이며 홍예문은 굳게 닫힌 채 파루에 문을 열어 모든 사람을 통행시키고 인정에 문을 닫아 모든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켜 수도 방위와 치안을 담당하였던 그 중대한 기능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은 우리 민족의 혼이 서린 문화유적인 도성을 도시계획에 의하여 철거하겠다고 하여 우리 민족이 이에 항거하자 소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1907년에는 남대문 부근의 성벽을 철거하였고 융희 2년(1908) 3월부터는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서소문(소의문) 부근의 성벽 77칸과 남대문 부근의 성벽 77칸을 철거하였으며 그들의 소위 도시계획에 저촉되는 것이면 모조리 철거하였다[註].

    이와 같이 성벽이 철거되고 성문이 개방되었고 광무 3년 5월 17일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었다.[註]

    그런데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수 없으나 현재는 흥인지문이다. 철종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개건하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동대문의 건축 양식을 살펴보자.

    동대문은 무사석으로 적석하여 축대를 만들고 그 중앙에 홍예문을 내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에는 철갑을 씌운 커다란 두쪽 판문(板門)을 달았다. 홍예문 상의 천장은 남대문처럼 하고 역시 채회(彩繪)하였다.

    이 축기(築基) 전면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다 왼쪽 일부를 터 놓은 평면의 옹성이 부설되어 있다. 옹성의 상면에는 전후여장(女墻)을 쌓고 중앙에는 성로(城路)를 내었는데 여장에는총안(銃眼)을 내어 외적을 방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의 벽도 무사석으로 축석되었다.
    문루는 남대문과 같이 아래층 전부를 개방하고 바닥에 흙을 깔고 중앙칸에만 마루를 깔았으며 상층 주간에는 판문을 사방으로 쭉 달고 바닥에는우물마루를 들였다.

    공포(慊包)의 수법도 그 골격은 남대문과 큰 차이 없으나 세부의 수법은 그와 다르다. 아래층의 공포는 내3출목, 외2출목으로 짜여지고 위층의 그것은 내외3출목으로 하였는데 그 솜씨는 대단히 섬약하며쇠서같은 것은 극히 나약하고 각각 조각 부분을 첨가하여 남대문에서와 같은 견실감은 잃었다.
    가구(架構)는 남대문의우고주(隅高柱)가 생략되고 상층의 병연주들은대량(大樑) 위에 놓이도록 되었다. 그 외의 수법은 남대문과 비슷한데대량이 단척물(短尺物)로고주(高柱)몸에 합장되고 고주가 치솟아종량(宗樑)을 힘있게 받은 점과 종량에 짜여진 중도리밖의 내목도리짜임 등은 남대문과 다르다.

    천장도 남대문과 같은 연등천장이고, 처마도겹처마, 각 마루에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고사래에토수(吐首)를 끼는 수법도 그와 같다.

    단청은 반초머리의 모루단청, 삼층판문에는 쌍파문(雙巴文)을 그리고장화반(長花盤)에는 호접형(胡蝶形) 당초문(唐草文)을 부각하고 그에 따라 채색하였다.

    이 문은 태조 창건시부터 짓는데 고심을 한 건물이다. 지대가 상습(常褶)하여 지반이 침하할 우려가 있어 기초 공사에 상당히 주의하여야 되었고 축대를 쌓는 데 있어서도 그 점에 집착되어 재건시에는 남대문처럼 잡석을 넣고 회반죽하여 방아찧어 다지는 적심층(積心層)을 만들지 않고장대석(長臺石)을 엇매껴 쌓는 방법을 썼다.

    남대문이 초기적인 소박한 미를 갖는 반면에 동대문은 정교하고 전자가 경직한 느낌인데 후자는 섬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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